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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우리나라의 도서관 문화는 중국문화의 영향으로 불교가
중심이 된 왕실문고 형식으로 독자적인 도서관을 발전시켜왔다. 중국에서 전래된 문화(특히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에 불교가 중심이 되었다, 또한 이 시대의 문화는 왕이나
귀족·
학자 등 일부 지배계급들의 특권이어서 왕실을 위주로 발전되었다.
(삼국시대 - 3국이 각기 건국 초기의 부족국가적인 틀에서 벗어나 고대 민족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기 시작한 때부터 고구려·백제가 멸망하고 통일신라시대가 개막되기까지의 시기이다. 3국은 108년 중국 한(漢)나라가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그 고지(故地)에 둔 한사군(漢四郡)의 세력이 강원도와 충청남도의 일부에
까지 미치자 이에 눌려 긴 정체기(停滯期)를 보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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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년 고구려가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樂浪郡)을 차지하고 이어 대방군(帶方郡) 등 한반도에 깊숙이 뿌리 박았던 중국 세력을 몰아내면서 3국은 세력 신장(伸張)을 위한 각축(角逐)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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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B.C.37-A.D.6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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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졸본지방에서 일어나 한반도 북부와 중국 둥베이 지방에 위치했던 고대국가이다. 지리적으로 중국과 가장 가까이 위치하고 있던 고구려는 삼국 중 가장 먼저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삼국사기'의 고구려 본기 소수림왕조에는 불교의 전래, 경전의 전래에 대한 기록이 있다. 소수림왕 2년(A.D.372년)에는 백제의 공격으로 국왕(고국원왕)이 전사당하는 비운을 경험한 직후의 시점으로서, 국가의 재도약을 위해 여러 가지 개혁정책들이 취해지고 있었다. 불교 공인과 율령 반포와 함께 태학 설치가 이 때 취해진 대표적인 개혁조치였다. 태학에서는 오경(五經) ·삼사(三史)
《삼국지(三國志)》 《문선(文選)》 등을 가르쳤으며, 이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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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학(漢學) 교육과 도서관의 서적문화가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도서관 사적인 입장에서 보면 소수림왕 얼마 전에 설립되기 시작한 경당을 간과할 수 없다. 이것은 굳이 말하자면 우리나라 최초의 도서관이기 때문이다. 경당은 미혼 남성들이 모여 송경하고 궁술을 익히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태학과는 달리 서민층을 대상으로 했다. 고구려에는 당시 도경, 삼국지, 지림, 자통, 문선 등의 서적들이 유포되고 있었는데 경당에서 필히 이러한 서적들을 구비하고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서적이 그리 흔치 않았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독서, 송경하는 경당에서 이러한 서적들을 수집, 보관하며 이용할 수 있도록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
백제 (B.C.18-A.D.6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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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기원전 18년에 한강 하류에서 건국되었으며, 서기 660년 사비도성이 나당연합군에 의해서 함락되기까지 충청도·전라도 지역과 강원도·경상도 일원을 678년간 지배했던 왕국이다.
해동 국사나 후주서에는 백제인들이 많은 서적을 읽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들이 남아 있다.
또한 고이왕51년 (A.D.289)에 사신 아직기가 일본에 서적을 전하였는데 이것은 고이왕 이전에도 상당한 서적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한문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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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급도 빨랐던 백제는 4세기 중엽인 근초고왕때 박사 고흥이 국사인 서기를 편찬했는데 그 뒤 백제기, 백제신찬, 백제본기 등 이른바 백제3서가 잇따라 편찬되었다. 이후에도 백제의 발달 된 문화는 수차례에 걸쳐 일본에 서적과 문화를 전달한바 백제에도 도서관 시설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