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만나뵈면 정말 그런 시절을 지내셨을까 할 정도로 정정하시고 하얗고 맑은 피부를 가지고 계신 박순옥 할머니는 올해 85세이십니다.
철원에서 태어나 부자집딸로 남부럽지 않게 자랐습니다. 하지만 해방 후 6.25가 발발하고 피난길에 오르고 경기도에서 정착해 살아왔습니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세상은 험악해져갔습니다.
“오빠, 엄마, 나 다 붙잡혀 갔지. 빨갱이한테 붙잡혀 갔지. 지주라고.
남편은 똥통에 숨어서 간신히 모면했어. 빨갱이들이 후퇴를 하면서 우리를 붙잡아갔는데,
오빠만 붙잡고 우리를 내주더라. 오빠를 고문하는데. 말도 못해…….
눈이 펄펄 쏟아지는데 오빠를 발가벗겨놓고 고문을 하는 거야. 동생이 그걸 어떡해봐.
이 얘기를 어디다 다해…….(울음) 같은 조선 사람끼리 서로 의지해 사는 거지.
이럴 수 있냐고. 그냥 막 들이대니까 민청 남자들이 붙잡아. 그래서 ‘이 개새끼들. 너희들이
뭔데 나를 붙잡아. 어째 사람들이 죄 없는 줄 뻔히 알면서 잡아다가 이 따위 짓거리를 하냐!’
오빠가 그 고문을 당하고, 며칠 있다가 또 붙잡혀 가서 행방불명으로 죽은 거예요.”
그 과정을 겪고 난 후, 남으로 피난을 해야만 했죠.
“ 사람들이 (연탄 때문에) 눈만 빤질빤질, 모두 새까매.
(피난민들의 몰골이) 짐승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고. 미군들이 와서 ‘쏼라쏼라’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있나. 그렇게 가다 서다, 가다 서다 사흘을 가는데. 배가 고파 죽겠는 거야.
피난 나올 때 이만큼 큰 통에 밥을 해 가지고 나갔는데.
시할머니가, 아휴……. 내 식구가 최고지.
글쎄 ‘아무개 아버지 이리 오소!’ 하면서 동네사람들을 먹이고 여자가 먹으면 뭐해 하고
나를 못 먹게 하더라고. 고모는 뒤에서 손만 넣어서 주먹으로 퍼서 잡수시던데.
나는 손 넣고는 못 먹겠소. 체면 가리다 보니 나만 굶은 거야.
세상에. 한 끼 건너, 두 끼 건너, 세 끼 건너 다 죽게 생겼네.”
어렵게 수원으로 내려와 정착을 했고 시댁에서 운영하는 한약방에서 일하면서 대식구들을 뒷바라지하면서 살림을 불렸지만, 남편은 다른 여자들을 공공연하게 만나러 다니는 그런 세월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이제는 아들이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는 한약방이 예전에 비해 잘 운영되지는 않지만 할머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 없을 때는 공부하고, 있을 때는 보시하라고 했어.
지금 공부해야 돼. 아버지 있을 적에 고통 안 받고 호강스럽게 살다가,
어떻게 그렇게만 사니? 없을 적에 공부해야지.
파도는 나가기만 하는 거 아니야. 들어오면 알게 되는 거야.
돌부리 직접 차 본 사람이랑 알기만 하는 사람은 달라.
사람이 살다보면 어려울 때도 있고 좋은 적도 있고 나쁜 적도 있지.
어떻게 좋을 때만 있게 사냐.
그 공간을 잘 메꿔서 살아놓으면 다 살길이 돌아온다. 걱정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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