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타이틀


역사가 영웅을 만든다고 합니다. 직업마다 떠오르는 대표적인 이미지들이 있는데 ‘사서’라고 하면 대부분 조용하고 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이러한 이미지는 소설이나 영상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윤대녕의 소설 <지나가는 자의 초상>의 주인공 황동우는 폐쇄적인 공간을 좋아하고 소극적이며 내성적인 인물로 묘사됩니다. 최인호의 장편소설 <사랑의 기쁨>에는 불친절하고 무뚝뚝하며 자신만의 세상 속에 갇혀 사는 등장하는 시립도서관 사서가 등장합니다. 사실 사서와 영웅의 이미지에서 공통점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http://www.tvdsb.ca/Beal.cfm?subpage=208509


하지만 혼란스런 한국의 역사 속을 잘 들여다본다면 숨겨진 ‘사서 영웅’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물론 전쟁에 나가서 적군들을 물리쳐 큰 공을 세운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분들은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도서관과 장서를 지켜낸 분들입니다. 세상이 멸망하더라고 미국의 의회도서관만 건재하다면 언제든지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들 합니다. 도서관이 갖고 있는 책 속에 인류의 지혜와 기술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도서관을 지켰다는 것은 우리나라가 지금까지 쌓아온 찬란한 역사를 지킨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백린 선생이 타계했다는 기사가 모 신문에 실렸습니다. 아마 그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백린 선생은 우리나라의 사서 1세대로 1948년 서울대 도서관 사서로 부임한 이후 격동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우리나라의 귀중한 장서를 지켜냈습니다. 지난호에서 조선총독부도서관의 박봉석 선생이 해방과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도서관의 장서를 지켰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백린 선생 또한 도서관계에 숨겨진 또 한명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맨 좌측 검은 안경 쓴 분 / 한국경제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5110974501


서울대 규장각에는 세계 기록유산에 등재된 ‘승정원일기’와 국보 152호 ‘비변사등록’, 국보 153호 ‘일성록’ 등 국보급 도서를 포함한 고서 17만5천여 점을 비롯하여 고문서, 책판 등 총 30여만 점을 보유하고 있는 우리나라 문화유산의 보고입니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남북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규장각에 소장된 고서 2만여 권을 미군 트럭과 화물열차를 이용하여 부산까지 무사히 피난시켰습니다. 부산에 피난해 있는 동안 자료가 혹시 없어지지 않을까 걱정돼 신혼이었음에도 반년이 넘게 승정원 일기 옆에서 참을 잤다고 합니다. 전쟁 직후에는 도서관으로 돌아와 북한군이 책을 가쳐가기 위해 도서관 바닥에 쏟아 놓은 도서 60만권을 정리하여 단 3개월 만에 정상화 시켜 놓았다고 합니다.


http://www.cha.go.kr/unescoGallery/selectUnescoGalleryView.do?id=189956&hcode=record3&category=%EC%8A%B9%EC%A0%95%EC%9B%90%EC%9D%BC%EA%B8%B0&searchWrd=


1965년에 백린 선생은 도서관 열람과장으로 일제 강점기 일본에서 규장각의 도서를 반출해간 사실을 발견합니다. 1911년 5월 11일자로 일본 궁내부 대신 와타나베가 데라우치 조선총독에게 보낸 서한인데 그 편지에는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가져가 일본 궁내성 도서관에 보관된 도서 중 필요한 일부의 책을 보내 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대출이란 명목으로 반출해간 도서가 1028권에 달하고 이 가운데는 “계원필경”, “지봉유설” 같은 귀중서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백린 선생의 발견을 근거로 1965년과 2010년 두 차례에 걸쳐 대부분의 도서를 한국으로 반환하게 됩니다.

이후 규장각 도서의 현대목록을 작성하는 등 도서관에 많은 업적을 남기고 1973년 하버드 예칭도서관 사서로 자리를 옮깁니다. 이곳 20여년을 근무하며 중국식으로 되어 있던 도서 목록을 한국식으로 모두 바로잡고 자료 전산화를 이끌어 예칭 도서관이 미국 최고의 한국학 도서관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406161904291&code=100100
백린 선생은 도서관 본연의 업무에 사명을 다했을 뿐만 아니라 대학에서 후학 양성과 연구 활동에도 매진하였습니다. 1962년 연세대학교에서 <奎章閣藏書에 對한 硏究>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미국으로 떠나기 전인 1972년까지 총 44편의 논문을 남겼으며 55년 이후 연세대, 성균관대, 이화여대에서 서지학과 도서분류법 등을 강의했습니다. 1969년 한국도서관협회에서 발간된 <韓國圖書館史硏究>는 아직까지도 한국 도서관 통사를 다룬 유일한 책으로 남아 있습니다.
“사서는 단순히 책을 분류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책의 내용까지 파악할 능력이 있어야 진짜 사서다. 실력 있는 사서가 돼야 교수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제대로 봉사할 수 있다”고 강조한 백린 선생의 말씀은 전문가로서 사서의 사명감과 책임감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합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406161904291&code=100100


[참고문헌]

조찬식, 박민영. 대중문화에 나타난 도서관과 사서의 이미지에 관한 연구. 도서관 v.54. no.2. 1999.
http://www.bostonkorea.com/news.php?code=&mode=view&num=22511
임기상. 숨어있는 한국현대사 1권. 인문서원. 2015.
http://m.blog.naver.com/kimche27/110098377053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5110974501
http://www.libraryforum.kr/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