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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사이버도서관은 경기도디지털아카이브인 ‘경기도메모리’의 테마콘텐츠 구축의 일환으로 경기도민이야기 두 번째 수려선⑴을 발간했습니다. 그 두 번째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삶 : 수여선 길따라 삶의 역사가 꽃피다.

수원에서 여주까지 73.4km, 4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달렸다. 수여선은 세월 속으로 사라졌지만, 추억은 남았다. 수여선과 얽힌 수많은 이야기 속에는 당시 사람들의 삶이 있다. 그렇게 수여선이 지나온 자리마다 삶의 이야기가 피어나고 있다.

‘일상’으로의 여행

처음 개통될 당시만 해도 수여선은 용인, 이천, 여주 지역에서 장거리를 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신작로를 따라 버스가 간간이 다니긴 했지만 비포장도로에다가 버스비도 비쌌다. 그래서 많은 수의 사람들이 통학이나 시장 보기 등의 일상의 활동을 위해 수여선을 이용했다. 기차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낭만이 있다. 일상도 기차를 타고 떠나면 특별한 ‘여행’이 된다.

“우리 집은 용인에서도 한 정거장을 더 가야하는 제일리였는데 한동안 수여선을 타고 통학했어요. 수원까지의 구간에 터널이 매우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협궤열차의 사정이 좋을 리가 없어서 터널을 통과할 때면 기차는 온통 암흑천지가 되었죠. 그러면 남학생들은 여학생들을 찔러대며 장난을 쳤고 여학생들은 꺅꺅 소리를 질러대곤 했습니다.” (남궁요숙 / 당시 용인에서 수원 통학)

“남문이 우리 집이었어요. 남문에서 수원중학교 다닐 때 매교다리 앞에 철교가 있었다고. 건너다니기가 어려웠었고, 열차가 와서 다리 밑으로 떨어진 기억도 있어요. 화성역 앞은 특히 넓었는데 영동시장으로 짐을 옮겨 가고 그랬지. 화성사람들도 물건 사고팔려고 많이 타고 다녔어요.” (이필근 / 수원 남문이 고향)


“수여선으로 통학하는 애들이 많았지. 수원 농고로 많이 갔어. 애들 태워가지고 가면 화성역에서 까맣게 내렸지. 그때 수여선 생겨서 다 그리로 통학한 거지. 그리고 수여선 타고 시장을 많이 갔어. 일제 때 강제 수매를 했단 말야. 그래서 쌀을 딴 동네로 가져가면 안 되잖아. 조사가 심해서 쌀을 못 가지고 다녔어. 그럼 옷을 누벼서 그 속에 쌀을 넣고 입는 거여. 그래 가지고 화성 남문에 있는 수원 장으로 가고 그랬지.” (김학춘 / 용인시 양지면 제일리 거주)

당시 사람들에게 ‘장보러 간다’라는 것은 ‘사다’와 ‘팔다’가 합쳐진 의미였다. 따라서 장에 오가는 동안은 늘 짐이 많았다. 수여선은 짐을 부리기가 좋았다. 보따리를 짊어 맨 많은 사람들이 수여선을 타고 수원이나 용인 등의 큰 장에 나가 물건을 팔았다.

“용인에서는 장날이 되면 많이 이용했죠. 장사꾼들이 옮겨 다니잖아요. 보따리장수들이 수여선 타고 와서 장을 펼치고 그랬죠. 수여선이 통과되는 지역에 살고 있는 농민들이 장에 내다 팔아야 하잖아요. 농산물을 판매하기 위해서 싣고 용인 장날에 나온 거예요. 지역에서는 그런 걸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수여선은 주변에 살고 있는 농민들에게 큰 혜택이었죠.” (김장환 / 용인문화원 사무국장)

수여선이 생기기 전에 수원, 용인, 이천, 여주 등의 지역 교류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수여선이 생기고 열차가 오고가면서 각 지역의 교류도 활발해졌다. 지역민들의 삶의 반경이 넓어지면서, 자연히 사람들이 향유할 수 있는 문화도 풍성해진 것이다. 떨어져 있던 지인들도 더 쉽게, 자주 만날 수 있게 되었고 각 지역 문화들도 더 쉽게 누릴 수 있게 되었다.

10살 때 이천에 계신 고모님댁을 가기 위해 수여선을 몇 번 탔던 기억이 나네요. 하도 어릴 때라 기억나는 건 특별히 없지만 기차가 한없이 달렸던 기억이 납니다. 구불구불 돌아가는 길도 많았구요. 어린 마음에 신기해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네요.” (정기한 / 수원시 탑동 거주)

“친정에 갈려면 수여선을 타고 갔지. 우리 친정이 신갈이거든. 갈 수 있는 교통편이 (수여선) 하나 밖에 없으니까.” (강춘옥 / 용인시 양지면 제일리 거주)

“수여선 타고 여주 신륵사로 수학여행을 갔어요. 내가 지동초등학교 졸업했는데, 수원에서는 당시에 여주 신륵사로 수학 여행가는 것이 최대 멀리 가는 여행이었어요.” (최중영 / 수원문화원 부장)

“이천 갈 때 자주 탔어요. 여기는 목욕탕이 일주일에 한 번 밖에 문 안 열었거든. 근데 이천에는 온천이 있잖아. 그리고 먹거리도 맛있고, 놀 거리도 많잖아. 그래서 기차타고 이천으로 온천 목욕하러 가고, 맛있는 거 먹고 그렇게 놀다 오고 그랬어요.” (이보택 / 일간경기 언론인 / 여주시 거주)


그렇게 사람들에게 수여선은 늘 곁에 두고 편하게 보는 친구 같은 존재가 되었다. 사람으로 가득 찬 열차는 늘 만원이었고 사건 사고도 자주 발생했다. 60년 대 중반까지 수여선은 여객 수송이 총 수입의 60%에 이를 정도로 주변 인구의 이동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여승무원이 하나 있고, 차장이 있어. 여승무원은 차표 끊고 그런 거 안내해주고 하는 거야. 그리고 열차에서 사고 나면 수습하고, 연락하고, (열차 안에서) 어린아이 낳는 사람도 있어. 그러니 승무원이 꼭 필요한 거야. 기차는 승무원을 믿고 가는 거지. 옛날에는 100명이 탔으면 입석이 400~500명이야. 기차를 명절 때 타려면 밀어 넣고 선반 올라가고 서울역에서 부산가는 기차가 하나밖에 없어. 옛날에는 몇 개 있었는데, 오래 걸렸다고. 석탄을 때서 기관조수관이 석탄을 집어넣는 거야. 잘못 넣으면 기차가 빨리 달릴 수가 없어.” (박운동 / 前역장 / 수원시 세류동 거주)

‘새로운 산업’ 등장

수여선 개통의 목적은 농·임산물의 반출이었다. 수여선은 선박, 화물차, 수인선, 경부선 등과 연계되어 많은 물품들을 실어 날랐다. 그렇게 많은 화물들이 오가다보니, 수여선 역사에는 물류 창고들이 생겨났다. 이로 인해 생겨난 것이 ‘마루보시’(丸星)다. 마루보시는 일제강점기 각 철도 정거장에서 물자운송 및 하역작업을 전문으로 하던 운송회사였다. 당시 정식명칭이 있었지만 일본인이 쓰던 ‘마루보시’란 말이 더 익숙해 통상적으로 마루보시라 불렸다. 마루보시는 거의 모든 역마다 있었다. 독점적인 택배화물회사였던 셈이다. 이처럼 수여선의 각 역사들은 물류창고의 거점 역할을 했다.

“수여선 정거장 거기에서 나오는 수하물들 보관하는 창고. 그 창고가 그 당시에는 보관만하는 것이 아니고 농산물들 있잖아요. 벼 같은 것들. 이런 것들을 도정하고 가공하는 방앗간을 운영한 거죠. 운영하던 그 사람은 ‘와루보시’라고 불렀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찾아보니 ‘와루보시’가 아니라, ‘마루보시’가 맞아요. 광복이후에는 오늘날에 대한통운이 되었죠. 예전에 여기에서 수하물을 보관했죠. 일종의 물류창고 같은 개념이었어요.” (김장환 / 용인문화원 사무국장)

‘공장’도 생겨났다. 수여선 열차가 지나가는 김량장동 중앙시장 공용화장실 부근에 운모공장이 생긴 것이다. 운모는 표면이 생선의 비늘처럼 생겨 ‘돌비늘’이라고도 불린다. 화강암계통의 광물질로 내화성이 강하고 전기의 부도체라서 전기 절연물이나 내화재로 쓰였다. 수여선은 화강암을 가득 실어 운모공장으로 가져왔고, 공장 안에서 지역의 여성노동자들이 운모를 떼어내는 작업을 했다. 운모도 당시 공출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아, 일제는 채취한 운모를 일본으로 가져가 가공한 후 전기 절연체나 탄연 등 군용물자의 재료로 썼을 것이다.

수여선과 전쟁

수여선이 수탈해 간 것은 비단 농·임산물만은 아니었다. 일본은 무차별적 징병을 했다.



수여선 역시, 마을 청년들을 실어 나르는 기능을 했다.

“열차가 징병제에도 많이 쓰였지. 징용들 많이 갔으니까. 나중에는 군대도 가고. 한국군도 가고. 제일리역과 양지역에서 모여서 타면 집결지가 수원인가 그랬지.” (김학춘 / 용인시 양지면 제일리 거주)

“군(징용) 갈 때 수원까지 그걸(수여선) 타고 가서 국철로 갈아타서 논산훈련소로 갔다구. 그때 그런 일도 있었어. 휴가를 나왔는데 술을 많이 먹어서 논산으로 가야하는데 기차를 잘못 타서 대구까지 내려간 적도 있었다고.(웃음)” (길상기 / 이천시 관고동 거주)

“여주에서는 징병갈 때 다 수여선을 타고 갔어요. 수원에서 집결해서 군에 가니까. 근데 열차가 냄새가 지독해가지고 겨울에 가는 사람들은 추워도 문도 못 닫고 가고 그랬지.” (이보택 / 일간경기 언론인 / 여주시 거주)


6.25전쟁 때도 수여선이 이용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1951년 1월 25일부터 27일 까지 용인의 김량장동 일대에서는 벌어진 ‘금양장리 전투’다. 당시 중공군과 UN 군이 그곳에서 전투를 벌였다. 당시 중공군 사상자만 1,9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큰 전투였다. 이 전투에 참여하기 위해 중공군과 UN군이 수여선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수여선이 준설이 될 때 노동력 착취가 많이 일어났었어요. 폭동이 일어날 정도로 수탈을 했지. 그렇게 지역 주민들이 고통을 겪고 힘들게 만들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수여선 기차로) 징용, 위안부에 끌려가는 거예요. 그리고 나중에는 중공군이 이 기차를 타고 들어왔어요. 유엔군도 그걸 타고 내륙으로 들어갔다는 기록이 있어요. 그러니까 수여선이 굉장한 의미가 있는 거죠. 용인이 42번 국도가 옛날 신작로까지 확장되어서 깔리기까지만 해도 굉장한 교통수단이었어요.” (김장환 / 용인문화원 사무국장)

꼬마기차

수여선은 협궤(狹軌)열차다. 협궤의 한자어를 풀어보면 ‘좁은 바퀴자국’이다. 수여선 선로의 폭은 약 72m 정도로, 경부선의 반에 불과했다. 폭이 좁다보니 자연히 기차도 작았다. 평생 수여선을 비롯한 기차를 운전했던 최수현 기관사의 증언에 따르면 수여선은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석탄을 연료로 하는 기관차고, 하나는 기름을 연료로 하는 동차였다.

“수여선이나 수인선은 다른 열차보다 폭이 좁아서 꼬마기차라고 불렸어요. 지금도 수원역 앞에는 급수탑 흔적 있잖아. 출발할 때는 그 급수탑에서 항상 물을 받았어. 기관차는 객차를 2개 정도 싣고 다녔어요. 소금이나 쌀 같은 거를 실어 날라야 하니까. 동차는 하나씩 다녔지.”

기차가 작았다는 것은 여러 가지 사건, 사고에서도 드러난다. 당시 35살의 젊은 기관사였던 최수현은 동차를 운전하다가 트럭과 충돌했다. 1961년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추럭은 전복(되고) 동차는 크게 부서졌다.’고 한다. 또 1962년 동아일보에서 수여선 기차와 군용 트럭이 충돌해 수여선과 트럭 모두가 전복되었다는 기사를 찾을 수 있다. 기사에 따르면 수여선 기차의 정원은 49명인데, 당시 추석대목장사꾼과 귀성객 70여 명이 타고 있었다. 군용 트럭과 수여선의 동차는 신갈 건널목에서 충돌했고 둘 다 전복되어 16명의 중상자와 29명의 경상자를 냈다. 지금으로서는 기차와 트럭이 충돌해 같이 전복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당시 수여선은 폭이 좁은 협궤 열차였고 정원이 49명밖에 안 되는 작은 열차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수여선을 ‘꼬마기차’라고 부르며 더 친근하게 여겼다.

아이들의 놀이터

수여선 철로는 하루에 왕복 4번 정도 다녔다. 대부분의 시간은 비어있는 장소였다. 기차가 오더라도 아주 빠르지 않았다. 자연히 아이들에게 철길은 놀이터가 되었다.

“어릴 적엔 겨울이 되면 영락없이 철로 변에 모여 레일 위에 대못을 주르르 올렸어요. 그 위에 물 적신 종이를 덮어놓으면 열차가 지나간 뒤 납작하게 눌린 못들을 얻을 수 있었거든요. 그것은 썰매 끄는 지팡이 쇠꼬챙이로 아주 요긴하게 쓰였죠.”

“철로에다 대못을 해가지고 구부려 놓잖아요. 열차가 지나가면 대못이 납작해지니깐 그거 가지고 칼싸움하고 그랬어요. 어른들이 전쟁놀이한다고 혼내고 그랬죠. 그래도 그때는 그런 거 아니면 놀게 없었으니까. 철도 선로 위에 돌을 올려놓으면 어른들이 하지 말라고 했다고. 기차 넘어간다고.(웃음)”


수여선 철로 위에 대못을 올려놓고 놀았다는 인터뷰는 여러 명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그 만큼 아이들이 많이 했던 놀이었던 것 같다. 그 외에도 기찻길에서 놀다가 기차가 오면 옆으로 뛰기 등의 놀이를 했다는 증언도 있었다. 아이들은 그 아슬아슬함을 즐기며 놀았을 것이다. 그렇게 신나게 놀다가 간혹 의외의 수입을 올리는 경우도 있었다.

“집 앞에 논 그리고 철길이었어요. 집과 철길 사이가 약 100미터 거리 밖에 안됐으니까. 저기 기차가 오는 기적소리가 들려요. 당시에 (기차타고) 놀러 갔다 온 사람이 소주병 같은걸 먹다가 논에 다 집어던져. 그럼 안 깨지는 게 있잖아. 그거 가져다 팔아서 엿 바꿔 먹고 그랬죠.”

느릿느릿, 세월을 낚는 기차

수원에서 시작해, 용인, 이천, 여주를 거쳐서 달리는 수여선은 정거장마다 사연 들이 많다. 수여선 노선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원-화성(본수원)-원천-덕곡-신갈-어정-삼가-용인-마평-양지-제일-오 천-표교-유산-이천-무촌-죽당-매류-광대리-신대-여주

이중 덕곡, 삼가, 마평, 표교, 무촌, 죽당, 신대 등 7개 역은 간이역이었다. 그런 데 이 간이역에 포함되지 않는 ‘특정 가문을 위한 간이역’도 있었다. 이는 당시 의 사회적 분위기를 읽을 수 있는 중요한 에피소드 중 하나다. 기차라는 수단 자체는 누구나 일정한 금액만 내면 ‘평등하게’누릴 수 있는 신문명이었다. 그러나 특정한 사람들을 위해 없던 간이역이 생길 정도로 아직 봉건적인 시대였다. 그런 이질적인 시대를 관통하며 수여선은 달렸다.

“제일리 옆에 추자리에 있었어요. 추자역인가 그래요. 친일파 송병준이11 양지 현감을 1891년인가, 92년인가 했어요. 그래서 99칸짜리 저택을 내려줬거든. 30년대에 송병준 아들 때였는데. 그때도 워낙 세도가 셌지. 그런데 이 열차가 송대감 댁을 빗겨가는 거야. 그래서 간이역이 생겼어요. 기차가 지나가면 송대감네 하인이 나와서 기차를 세워요. 그리고 송대감이 나와서 타면 기차가 출발하고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송가네가 간이역 만들었었지. 대여섯 발자국만 걸어가면 될 것을 역을 만들었어. 지금은 다 헐어서 아무것도 없어.”


이처럼 없던 간이역도 생기다보니, 기차는 더욱 속도를 내기 힘들었다. 기차가 직선을 달릴 때는 어느 정도 속도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굽은 길도 많고, 언덕도 많았다. 또 역도 많아서 조금 달리다보면 정거장을 만나서 서야만 했다.

“수여선에는 굴이 2개가 있어. 화성 신갈 가는 데에 하나가 있고 오천에서 이천 가는데 하나가 있어. 수여선 동차의 경우에는 선로에서 55키로를 놓고 달릴 수가 있어. 화차(기관차)는 속도 60키로를 놓고 달릴 수 있지. 그런데 정거장 들어가거나 커브 길에 갈 때는 속도를 줄여야 돼. 15키로 인가 밖에 안 돼. 수여선은 화성에서 여주까지 73.4키로야. 그 거리를 운전하면 평균속도가 22키로가 나오는 거야. 그러니까 3시간 50분 (이상 걸리는) 거리야. 달리다가 고장이 나거나 너무 짐이 많아 속도가 안 나면 손님이 내려서 같이 걸어가기도 했지.”

“집 앞에 약간 언덕길이 있었어요. 법원사거리에서 동수원사거리까지 경사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열차가 힘에 부쳐서 못 올라오는 거야. 엄청 느리지. 그러니까 법원 앞 원천역에서 그냥 탈 수 있는 거예요. 열차가 타보고 싶어가지고 원천역까지 걸어가서 몰래 타보고 집에 온 적도 있어요.”

“여주에서 양지로 오다보면 마수고개라고 있는데 열차가 고개를 넘을 때 천천히 다녔어요. 철길도 많이 걸어 다니고 그랬는데 척척척, 기차소리가 나면 피하고 그랬죠. 원체 늦었으니까 사고 나고 그런 건 없었어요. 재밌었죠. 몰래 타고 내리는 재미도 있었고. 통학할 때는 학생들이 많이 타서 쌈박질도 많이 했어요. 열차에서 패싸움도 하고, 내려서 역전에서 내려 싸우고. 그래도 그때는 신사적으로 싸웠어. 각목 들고.(웃음)”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했던 것이 용인에 있는 ‘메주고개’였다. 메주고개는 용인 삼가에서 어정을 잇는 고개로, 이곳에 수여선 두 개의 터널 중 하나인 멱조현 터널이 있다. 수여선이 이 고개를 넘어가는 것이 쉽지 않았는지 이 고개와 관련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들려온다.

“용인 메주고개에 오면 승객을 내리라고 해요. 그리고는 200~300미터 밖에서 탄력을 받아서 올라간다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한번 만에 못 올라가서) 2, 3번 반복해서 올라가기도 하고 (그랬다고 해요).“

“우리 고등학교 생물선생님이 동백 구성 쪽에 집이 있었어요. 자전거를 타거나 수여선 열차를 타거나 해서 학교를 왔는데, 하루는 자전거를 타고 오다가 메주고개 터널입구 에서 열차를 만난 거예요. 그래서 선생님이 자전거 탄 나하고, 열차하고 시합해보자. 이러면서 자전거 페달을 밟고 가파른 메주고개를 넘었대요. 기차는 터널로 들어갔죠. 그리고 막 달려서 터널 반대쪽 출구 쪽에 와보니 기차가 안 나와서 ‘기차가 빠르긴 빠르네.’했대요. 근데 한참 후에 기차가 뒤에서 왔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기차가 워낙 느리기도 했지만 화물을 싣고 다닐 때는 두 량을 끌고 다녔거든요. 승객도 태우고 화물을 싣고 다녀서 무겁기도 했어요. 메주고개와 관련된 다른 이야기도 있어요. 메주고개가 높다보니까 이천에서 오던 열차가 화물칸이 떨어졌다고 해요. 용인역까지 거의 비탈이어서, 메주고개에서 떨어진 화차가 거꾸로 쭉 내려가서 마평동까지 갔다고 해요. 열차는 화차가 떨어진지 모르고 신갈역까지 갔다는 이야기도 있었어요.”


이렇게 기차가 느리다보니 무리하다가 사고가 난 경우도 있었다. 열차가 삼가역 에 예정보다 46분이나 늦게 도착하자, 늦어진 시간을 만회하려고 용인 어정 간 내리막길에서 과속해 열차가 탈선한 것이다. 당시 동차는 약 5미터 언덕 아래 거꾸로 처박혔고, 추위를 막기 위해 열차 안에 피워뒀던 난로에서 불이 붙어 차 체 전체가 다 타고 말았다. 더욱이 수여선 내부는 나무의자라 더욱 불이 잘 붙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수여선 기차 객차 안에 잠깐 들어가 안을 훑어 본적이 있어요. 협궤열차인지라, 폭이 좁게 느껴졌어요. 좌석이 여타 일반 열차에서처럼 우단이 덧씌워진 게 아닌, 등받이에서 좌대에 이르기까지 나무 쪽 여러 개를 이어 만든 거라는 점이 눈에 띄었지요. 윤기가 흐르고 있었는데, 왁스칠을 해 놔서 그랬던 것 같아요.”

사라졌으나, 사라지지 않은

인디언의 11월은 ‘모든 것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란 뜻이다. 수여선은 1972년 3월 31일 폐선되었다. 마지막 운행하는 날 수여선에는 ‘주민여러분 안녕’이라는 현수막이 붙어있었다. 그렇게 수여선은 전 구간 운행을 마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지금 수여선은 그 흔적을 찾기가 거의 힘들다. 수여선이 다녔던 길 중 상당수가 재개발되어 건물, 아파트, 도로들이 들어섰다. 그렇게 수여선은 사라졌다. 그러나 수여선과 함께 했던 공간들은 그리고 그 공간들 속에서 살았던 수많은 시간들은 수여선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수여선의 기억을 모으는 이번 작업은 마치 인디언의 11월 달력을 펼치는 것과 같다.

수여선은 느리고 작은 꼬마 기차였다. 사건사고도 많았고 강제 수탈에 이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수원과 여주를 잇는 최첨단 문물이었다. 수여선 길을 따라 문명이 전해졌고, 문화가 꽃폈다. 사람들을 수여선을 타고 더 넓은 세상을 만났다. 그렇게 수여선이 달린 길 위에서 삶의 역사가 피어났다. 그리고 그 토대 위에 지금, 우리의 삶이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수여선은 사라졌으나, 사라지지 않았다.

- 참고자료 : 수려선 http://text.library.kr/DC2016/DC20160003/DC20160003.PDF
- 수려선 홈페이지
http://theme.library.kr/Suryeoseon/index.html

1) ‘수려선(水驪線)’은 처음 개통당시 불렸던 본래 이름이다. 경기도사이버도서관은 수원에서 여주까지 운행되다 폐선이 되어버린 수여선을 중심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발굴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수려선’이라는 제목으로 <경기도민 이야기 2> 책자를 발간하였다.

글쓴이. 은정아(수려선 집필)